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잘 가라나의 이야기(창작~수필·칼럼) 2009. 1. 5. 02:24
388 잘 가라
소리새/박종흔
이제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이다.
마지막 덩그러니 남아있는 한 장의 달력.
벽에 달라붙어 일 년 동안 참고 인내하며 마지막 한 장의 달력을 내어놓는다.
새삼 세월의 빠름을 논하지 않더라도
이미 정석이 되어버린 세월의 흐름처럼
주변의 변화에도 감각이 무디어진 것도 이미 오래전이다.
그래도 낡고 퇴색된 추억의 앨범을 열어본다.
얼마 전 은행잎들을 주워 책갈피에 넣어 두었다.
이미 바짝 말라서 예쁘게 모양이 잡혀있는 은행잎.
가지에 달려 있을 때와 길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
누군가의 손에 단아한 모습으로 변해 있을 때
여자의 변신처럼 변신술이 이채롭기만 하다.
가을은 중년의 계절.
특히 중년 남자의 계절은 왜 가을일까?
예전엔 왜 그런지 몰랐지만, 이번 가을에 그 이유를 대충 짐작했다면
중년 남자들에게 욕먹을 짓인지.
늦가을 비가 내리는 밤거리.
예전 같으면 시인이라도 된 듯 비를 맞았겠지만
실용주의 중년이기에 감기 걸리기 싫어 우산을 쓰고 걸었다.
아주 현명한 판단력을 동원한 듯 우쭐한 마음으로.
가뭄이 길었는데 모처럼 가을에 비가 내렸다.
다음 날 아침 무수한 은행잎들이 인도며 차도에 깔렸다.
은행의 특유한 인분 냄새와 비슷한 냄새 때문에 시민들은 늦가을의 곤욕을 치러야 한다.
또한 낙엽 때문에 길거리는 항상 지저분하다.
청소차를 동원하지만 매일 떨어지는 낙엽을 어찌할 수 없다.
아!
본론은 그게 아니라 중년의 계절이라는 가을 얘기다.
비가 내린 늦가을의 길거리 풍경은 그러한데.
요는~ 은행잎 같은 마른 낙엽 이야기다.
인도에 달라붙어 있는 낙엽을 발로 툭툭 차서 차도로 보내려 하지만
바닥에 착 달라붙어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.
혹시나 해서 다른 것을 시도해 보았지만, 답은 역시 같음이다.
비에 젖은 낙엽!
어쩌면 그리 길바닥에 달라붙어서
떨어지지 않는지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었다.
그런데 왜 갑자기 그 낙엽들과 우리네 중년 남자들의 얼굴이 교차하는지.
비에 젖어 길바닥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낙엽!
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.
이제는 젖은 낙엽 때문에 가을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.
그럼 무슨 계절에 아양을 떨어야 하나?
불쌍한 중년 남자들은 갈 곳이 어디란 말인가?
그래, 차라리 빨리 달력을 떼자.
그냥 자수해서 항복하고 광명을 찾자.
그러다 보면 비에 젖은 낙엽 신세는 면하겠지.
아~ 소리만 나오는 가을이 갔다.
그래 잘 갔다.
잘 가라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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